비가 오네요


친척 결혼식에 다녀온 뒤로 몸살인 건지, 더위를 먹은 건지 지쳐 쓰러져 기절상태였습니다.
3,4일을 그냥 날린 셈인데... 컨디션이 안 좋아서라곤 하지만 하던 일이 미뤄지는게 너무 짜증나고 화가 나더라구요.
오늘도 사실 거의 멍하니 그냥 보내버린 참이거든요.
그런데 저녁 먹을 겸 내려갔다가 마당에 잠시 나갔는데 때마침 비가 내리더라구요.
올해 첫 비는 아니지만, 더위에 지친 다락방 인생이다보니 오늘 내리기 시작한 비가 너무 반갑네요.
손을 뻗어서 팔에 묻은 빗방울들을 보다가 그대로 앉아서는 하늘을 올려다 바라봤는데,
사방에 빗소리와 흙내음이 가득했습니다.
태양의 열기를 품고 있던 시멘트 바닥은 빗방울이 부딪히자마자 찌르르-하고 벌레울음소리를 내고,
공사현장에 쓰이던 아버지의 플라스틱 통에 부딪히는 빗소리,
둥글레 잎줄기에서 나는 빗방울 소리,
동백나무 잎에서 나는 소리,
마당 건너편 세차장의 양철지붕에서 나는 소리 등 모두가 제각각 "나 여기 있어요"하는 것 같아서
꽤 오랫동안 그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아마 눈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날은 비오는 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비는 습한데 공기 중에 나는 흙냄새는 매우 메마른 그것이었습니다.
크리스챤 디올의 DUNE이라는 향수가 있습니다.
제가 향수를 모은다거나 평소에 향수를 뿌린다거나 하진 않지만, 언젠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향이 있다면 저 DUNE이거든요.
첫 향은 싫지만 시간이 지나면 메마른 느낌의 향이 나는 것이, 마치 하늘과 같은 색으로 짙게 물든 붉은 사막이 연상되는 향입니다.
DUNE이 그야말로 고운 모래의 사막이라면 오늘 맡은 흙냄새는 마치 식물 줄기를 비틀었을 때 나오는 생즙같은 느낌이랄까요...
메말랐지만, 뭔가 날 것이라는 느낌에 쎄-한 것이 아마도 여름의 열기를 품고 있어서인 듯 합니다.
오늘 맡은 이 흙냄새도 듄 만큼이나 맘에 들었습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비오는 날은 수없이 있었지만, 흙냄새를 이렇게나 강렬하게 기억하게 한 날은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조금 기분이 좋아지네요.

(그래서 작업이 도대체 언제쯤 기분 좋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요, 흐흐... 정신차리게 야단 좀 쳐주세요...)